한사군의 실존에 대해

2015. 3. 6. 10:01

한사군은 실존했을까? 그리고 어디에 위치했을까?


먼저 각종 자료에서의 한사군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교과서는 한사군을 언급하지 않았고

아틀라스 한국사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3개 군은 금방 멸망,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완전 흡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사 특강에서는 왕검성 함락 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때 많은 고조선인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교과서는 왜 한사군을 언급하지 안았을까?

일단 학계에서 한사군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한사군에 대한 논란은 단순히 그 설치 위치에 관한 수준을 넘어 그 실존 여부까지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서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소년들과 저자 스스로의 민족적 자긍심의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틀라스 한국사의 서술을 자세히 살펴보자.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이라는 식민지, 즉 한 군현을 만들었고 군 밑에는 현을 두고 한인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 식민 통치했다.

고조선 사회의 기존 조직은 위로부터 해체되고 고조선 주민들은 읍락 단위로 한의 군현 조직에 예속되었다. 8조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으며 낙랑군은 이후에도 한나라와 한반도 사이에 중계 기지 역할을 했다.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 군 중 3개 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고 313년 낙랑군은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아틀라스 한국사는 한사군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한사군은 분명히 고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어 고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에서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다고 서술했다.

동시에 낙랑군을 제외한 3개 군은 곧 폐지되었다고 서술했다.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으나 3개 군은 곧 폐지되었고 낙랑군이 언제까지 식민지 형태로 유지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즉 유물 등의 증거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점만 언급했다. 


그렇다면 한사군 논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사군 논란의 원인은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대륙에 설치되었다는 등 극단적인 환단고기 등에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의 주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환단고기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주장한다.


환단고기의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은 중국 대륙의 절반을 점유했다.

한사군의 실존 여부 및 설치 위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래는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의 인구 조사 유물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설치되었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28만 명 중 4만여명이 한족이라는 등의 정보로부터 초기에는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한사군 중 어떤 군도 초기 한나라에서 계획했던 식민지 구조로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래 연도를 참고하자.


고조선 멸망 : 기원전 108년

낙랑군 멸망 : 기원후 313년

한나라 멸망 : 기원후 8년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초기 한사군은 고조선의 영역의 식민지 형태로 설치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수도 평양에 설치된 낙랑군의 경우 인구의 1/7이 한족이였을 정도로 어느 수준까지는 식민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법치주의와 한족과 원주민 간의 불평등 정책 등으로 원주민들의 반발이 존재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낙랑군을 제외한 삼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은 본국인 한나라 멸망 후에도 유지되었는데 이는 낙랑군이라는 구조 아래 원주민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국이 멸망한 후에는 낙랑군 한족 세력만으로 원주민 세력을 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도 후기에는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사군은 실존했을까? 그리고 어디에 위치했을까?


먼저 각종 자료에서의 한사군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교과서는 한사군을 언급하지 않았고

아틀라스 한국사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3개 군은 금방 멸망,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완전 흡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사 특강에서는 왕검성 함락 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때 많은 고조선인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교과서는 왜 한사군을 언급하지 안았을까?

일단 학계에서 한사군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한사군에 대한 논란은 단순히 그 설치 위치에 관한 수준을 넘어 그 실존 여부까지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서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소년들과 저자 스스로의 민족적 자긍심의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틀라스 한국사의 서술을 자세히 살펴보자.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이라는 식민지, 즉 한 군현을 만들었고 군 밑에는 현을 두고 한인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 식민 통치했다.

고조선 사회의 기존 조직은 위로부터 해체되고 고조선 주민들은 읍락 단위로 한의 군현 조직에 예속되었다. 8조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으며 낙랑군은 이후에도 한나라와 한반도 사이에 중계 기지 역할을 했다.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 군 중 3개 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고 313년 낙랑군은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아틀라스 한국사는 한사군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한사군은 분명히 고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어 고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에서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다고 서술했다.

동시에 낙랑군을 제외한 3개 군은 곧 폐지되었다고 서술했다.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으나 3개 군은 곧 폐지되었고 낙랑군이 언제까지 식민지 형태로 유지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즉 유물 등의 증거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점만 언급했다. 


그렇다면 한사군 논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사군 논란의 원인은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대륙에 설치되었다는 등 극단적인 환단고기 등에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의 주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환단고기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주장한다.


환단고기의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은 중국 대륙의 절반을 점유했다.

한사군의 실존 여부 및 설치 위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래는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의 인구 조사 유물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설치되었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28만 명 중 4만여명이 한족이라는 등의 정보로부터 초기에는 식민지 형태로 관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한사군 중 어떤 군도 초기 한나라에서 계획했던 식민지 구조로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래 연도를 참고하자.


고조선 멸망 : 기원전 108년

낙랑군 멸망 : 기원후 313년

한나라 멸망 : 기원후 8년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초기 한사군은 고조선의 영역의 식민지 형태로 설치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수도 평양에 설치된 낙랑군의 경우 인구의 1/7이 한족이였을 정도로 어느 수준까지는 식민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법치주의와 한족과 원주민 간의 불평등 정책 등으로 원주민들의 반발이 존재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낙랑군을 제외한 삼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은 본국인 한나라 멸망 후에도 유지되었는데 이는 낙랑군이라는 구조 아래 원주민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국이 멸망한 후에는 낙랑군 한족 세력만으로 원주민 세력을 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도 후기에는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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